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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에 대하여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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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부터 46년까지 지속된, 명나라를 멸망시킨 그러나 신 왕조 수립에는 실패하고 청나라에 의해 종말을 고한 명 말엽 대규모 농민반란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100여년 가까이 누적된 명나라의 사회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의 기본적 질서인 농촌 사회는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갑제 역시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만 부역과 조세의 의무가 부과되었기에 농민들은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 즉 호적을 올리지 않고 유랑을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1505년 정덕제의 즉위를 시작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명나라 4대 암군, 소위 F4의 기나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덕제는 아바타 놀이 말고는 특별히 암군이라 부를 소지가 없었지만 가정제 치하 45년은 도교 신봉에 빠져 국고를 열심히 축내고 도교를 추종하는 권신이 조정을 좌우하면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로남왜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유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황제가 이 모양 이 꼴이고 조정도 권신이 좌우하니 대책 같은 걸 세울리가 있나…

이런 상황에서도 1620년대까지 명나라는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내부 통제에 들어가면서 남왜의 걱정은 사라졌고, 명나라는 모든 전력을 후금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 위기만 넘긴다면, 어떻게든 명나라는 되살아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휩쓴 대기근이 닥쳐왔다. 국가별로 시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25년~30년에 걸쳐 명나라, 몽골, 후금,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화북 지방의 기근이 극심했는데 1627년 섬서성 일대의 대기근이 결정타였다
이때의 기근은 유랑민들과 빈농들에게 결정타였고 이들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봉기한다

이 봉기와 군세가 조직화된 것은 1628년의 일로, 왕가윤(王嘉胤)이 봉기하며 군세를 조직했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 도적떼에 불과했던 각지의 반군들이 왕가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631년 왕가윤이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미 반란군에는 유능한 부장급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자성(李自成)이 왕가윤의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33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며 섬서, 산서 두 성을 차지한 고영상의 군대는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한때 전멸 위기에 처했으나 같은 해 겨울에 황하의 결빙을 틈타 산동, 하남으로 탈출하고 반란의 규모를 크게 불렸다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정부에 불만이 많는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한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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