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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의 난에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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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이루어진, 제주도에서 버티는 원나라 잔당들에 대한 최후의 진압
전투 자체는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1374년 8월 28일에 제주에 도착해 9월 22일에 평정을 완료하고 제주도를 떠났을 정도로 단기전이었고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선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설명하면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지만, 후술하듯 실제 전투 자체가 가지는 의의는 작지 않다

목호들은 다른 이름으로는 하치(哈赤)라고 해서, 대체로 말 기르는 전문 기술자로 해석된다
이때 원나라에서 말을 관리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들이 목호였다
물론 말만 기른 것은 아니고 소나 양, 낙타 등의 가축도 풀어 길렀다

제주로 파견되는 고려의 관리들은 대부분 탐라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악명이 높았다
도민들이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반란을 일으킬 때 그 사람을 다시 보내주면 반란을 무르겠다고 했을 정도
 고종 때의 제주판관 김구는 제주의 논밭마다 돌담을 쌓게 해서 사람들의 땅의 경계를 분정해주었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제주부사 김지석은 그때까지 바치던 세금을 줄여 없애게 했고 그 후임으로 온 경세봉까지는 그래도, 고려에서 온 관리로써 괜찮은 대접을 받고 좋은 평가도 많았지만 탐라가 몽골에 예속되고부터는 지방관이랍시고 부임한 인간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돈에 눈이 멀어서

홍건적의 난 이후 원과의 연합 필요성을 느낀 고려가 반원정책을 일부 후퇴시키면서 탐라 목호들은 다시 기세가 등등해졌고, 공민왕 11년(1362년) 8월에 목호 고독불화와 석질리필사가 탐라의 성주 고복수를 끼고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만호 박도손을 죽이고 10월에 본국인 원에 그들을 예속시켜 달라는 요청을 한다
원에서는 목호들의 요청대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를 만호로 삼아 탐라에 보냈고, 이에 맞서 고려 조정은 12월에 밀직부사 유방계를 접반사로, 다시 성준덕을 제주목사로 임명해 제주로 보내 그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의 우려와는 달리 원에서 보내 온 만호 문아단불화는 공민왕 12년(1363년) 6월에 아우 인부를 고려 육지부로 보내 말을 바치며, 자신들은 고려 조정에 거스를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공민왕 19년(1370년)에 고려에서는 탐라계품표를 명에 올려 과거의 연고(제주는 원래 고려의 땅이고 원은 탐라의 목초지만 썼을 뿐)를 내세워 탐라를 고려가 관할하고 탐라에 사는 목호와 그들의 말은 고려에서 보낸 관리들이 맡아 기르겠다고 했지만, 명에서는 이를 바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는데, 훗날 고려가 차지한 철령 이북의 땅에 대해서 한 것처럼 기회를 봐서 탐라에 대한 연고권(원나라가 지배한 땅이니 당연히 명나라의 땅이라는)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목호들은 이미 원이 북쪽으로 쫓겨난 뒤인 공민왕 18년(1369년)에도 반란을 일으켜 고려 관리를 죽였고, 고려가 명나라에 탐라계품표를 올려 탐라의 연고권을 주장한 뒤인 공민왕 21년(1372년) 3월과 4월에도 다시 반란을 일으켜, 박윤청의 후임으로 온 고려의 제주목사 겸 만호 이용장과 권만호 안방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제주의 말을 가지러 온 명나라의 예부 상서 오계남, 비서감 유경원 등이 고려 병사 300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4월부터 목호 석가을비와 초고도보개 등이 동서 하치를 자칭하고 “몽골 황제의 명이 아니고서는 명에 말을 보내려는 간택에 응할 수 없다"고 하였다고 했다(탐라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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