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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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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 대통령
독재자에 전쟁 범죄자로 부통령이었을 때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에 모처럼 평화를 가져오게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만든 인물이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판단력을 잃어가고 이웃나라 둘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으로 나라를 거덜내고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이름이 하필 '후세인'이라서, 국내에서 이를 잘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後世人 =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또 널리 알려지니 '이름에 후세인이 들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아랍계'라는 말이 널리 퍼졌는데, 재미있게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풀 네임에 '후세인(Hussein)'이 들어간다.(…) 이걸 알았을 때 충격먹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던 모양.미국발 뉴스에 그 나라에서도 가끔 그걸로 구설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니까
후세인(حسین)이란 이름 자체는 후세인의 삼촌인 하산 알 마지드가 지어준 것으로 ‘멋진, 아름다운’의 의미를 지니는데,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아랍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이라면 많이 사용하는 이름 중 하나로 후세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우마이야 가문이 시도하던 칼리프의 세습제 전환에 반대하며 저항하다가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죽음을 맞은 인물로, 키케로와 정몽주 비슷한 인물이다

이는 사담 후세인의 첫 아내인 사지다 하이알라 탈파가 1937년인생인데 나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불명예로 간주하던 이라크의 정서상 괜한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2살 많다고 조작을 했다는 설과 정계에서 나이 많은 경쟁자와 싸우는 것을 터부시하는 전통이 강하던 이라크 정계에서 활약하기 위해 자신이 연륜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이를 적당히 올렸다는 설이 있다
하이랄라 탈파는 1941년 라쉬드 알리 반란에 참여했다가 군에서 면직되어 5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었다
하이랄라 탈파는 후세인을 맞아들여 교육을 시켜주었다

후세인은 1953년과 1954년에 두차례 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이것이 친영파의 농간이라고 여겨 영국과 이라크 왕국에 대해서 굉장한 앙심을 품게 되었다
이후 하이랄라의 집에서 훗날 대통령이 되는 아마드 하산 알 바크르를 비롯한 티크리트 출신 장교들이 자주 회합했는데 덕분에 후세인은 1958년 쿠데타를 주도하게 되는 이라크 군부의 장교들과 두루 인맥을 쌓게 되었다
따라서 젊은 후세인은 아랍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3년의 이라크 군부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되고, 압둘살람 아리프 정권이 들어서자 바트당과 후세인은 이라크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아리프 정권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내부 갈등 봉합 실패로, 바트당과 시아파 등 내부 세력과 대립국면에 들어갔으며, 이때 사담 후세인은 체포, 수감되었다
허나 이때만 해도, 사담 후세인은 그가 존경하던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근대화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라크의 분열된 바트당 통합과 국가통일에 대해 바르그 대통령이 시리아와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바크르는 대통령이라는 대표성으로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차후 통일국가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3인자로 끌어내리되,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제1인자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논의하였다

보잘 것 없는 홀에서 삼엄한 경비 속에 열린 당회의에는 1천명의 당 간부들이 소집되었는데, 반역모의가 발각되었다는 당 개회연설로 참석자들이 당황하는 와중에 곧이어 다른 연설자가 당 중진 4명과 함께 시리아의 지령을 받고 후세인을 암살코자 했다는 자백문을 읽어내리면서 회의장이 완전히 얼어붙었고, 분위기를 파악한 몇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담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자백이 전부 끝나자 사담은 다시 올라와 반역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하면서 이제는 자기 입으로 모의자 이름들을 한 번에 10명 씩 총 60여명의 이름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참석자들은 자기 이름이 불리우지 않으려고 충성심을 과시하며 반역자들을 쏴죽이라느니, 지금까지 사담이 너무 관대했으나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느니, 공산주의 러시아의 스탈린 식으로 대응을 하자느니 등 앞다투어 강경한 처벌을 외치기 시작했다

바르잔은 후세인이 자신을 숙청할 것을 눈치 채고 다시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발악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82년의 두자일 학살사건이었다
훗날 이라크가 개박살나고 2003년부터 이라크 곳곳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묻혀있는 대량무덤들이 발견되고 발굴되었는데 시체가 너무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담 후세인 재임 기간 중 살해당한 사람은 적어도 50만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란-이라크전이 종전되면서 더 이상 이라크를 지원할 동기가 없어진 쿠웨이트가 전쟁부채 상환을 촉구하자, 전후 남아도는 게 군사력이었던 후세인은 또다시 즉흥적인 판단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그동안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방파제로써 국제사회에서 암암리에 용인 되었던 후세인의 지지기반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UN 차원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라크는 결국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 연합군에 그야말로 참패 당했고, 이후 UN결의안에 따른 광범위한 수출입금지 조치까지 당해 ‘가난한 돌의 왕국’이라는 멸칭(蔑稱)으로 불리며,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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